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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일 포커스

에너지 트릴레마
에너지 안보의 가치 찾기

글_ 조용채 교수(서울대 에너지자원공학과)

제국주의 시대부터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 각지에서 크고 작은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종전에 이를 것 같았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도 지난한 대치를 멈추지 않고 있다. 전장에서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그리고 합리적인 가격의 에너지원 공급이고, 이는 국가 경제와 산업 현장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우리는 과거부터 현재까지 에너지 안보와 가격 접근성 및 형평성, 이 두 가지의 가치 사이에서 합의점을 찾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해 왔다. 여기에 최근 기후 변화 이슈로 인해 친환경성과 지속 가능성에 대한 가치가 더해졌다. 최적의 에너지원임을 평가하는 데 있어 ▲안보 ▲경제성 ▲환경적 지속 가능성, 이 세 가지의 가치가 대립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 세 가지 요소를 동시에 모두 충족시킬 수 있는 해결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으며, 이를 ‘에너지 트릴레마(Energy Trilemma)’라고 한다.

에너지 트릴레마(Energy Trilemma)
출처 : World Energy Council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 에너지 안보에 대한 염려 증폭

일반적으로 국가가 에너지 정책과 로드맵을 구성할 때 당시의 국제적 관계, 최근 경제 및 산업의 상황에 따라 에너지 트릴레마 삼각형 내에서 최적의 합의점을 도출하게 되는데 이 기준은 시시각각 변한다. 가령,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전 세계 에너지와 원자재 가격이 급등하면서 공급망의 위기가 닥쳤을 때, 여러 국가가 에너지 안보에 방점을 찍고 안정적인 에너지원 확보를 최우선 가치로 두고 국내외 산업과 외교 정책의 방향을 결정했다.

에너지 정책과 로드맵을 구성할 때 당시의 국제적 관계
최근 경제 및 산업의 상황에 따라 에너지 트릴레마 삼각형 내에서
최적의 합의점을 도출하게 되는데 이 기준은 시시각각 변한다

환경 에너지 정책과 기술에 가장 진보적인 태도를 취해 온 독일의 경우를 보자. 독일은 수십년 동안 러시아로부터 석유와 가스를 공급받아 왔고, 이는 현대 독일의 경제 성장에 엔진 역할을 해왔다. 러시아산 원유와 가스로 에너지 안보를 구축하면서 이를 기반으로 청정에너지 기술 개발에 박차를 가하는 방식으로 에너지 트릴레마의 균형을 잡아온 것. 그러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가스 공급이 중단되자 독일은 하룻밤 사이에 에너지 정책 방향을 전면 수정했다. 현재 독일은 천연가스 가격이 높은 시기를 대비해 일부 석탄 발전소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쪽으로 전략을 바꿨다. 이러한 전략 수정은 비단 독일에만 국한되지 않고 유럽을 비롯한 전 세계로 퍼지고 있다. 이번 러-우 전쟁으로 촉발된 글로벌 에너지 위기는 국제적 분쟁으로 인한 에너지 안보에 대한 염려의 증폭이 전 세계의 에너지 공급과 수요에 미치는 영향을 여실히 보여주는 가장 최근의 사례로 볼 수 있다.

에너지 안보 vs 가격 적정성 vs 친환경적 지속 가능성

러-우 전쟁이 소강상태에 이르자 다시 기후 변화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글로벌 에너지 트릴레마 삼각형의 중심이 친환경성과 지속 가능성 쪽으로 기우는 모양새다. 기업이 이윤을 남길 수 있는 화석 에너지 탐사 및 생산과는 달리 탈탄소 프로젝트는 이 자체로 비용으로 인식된다. 더욱이 이 비용은 점점 증가하고 있어 각국의 정부와 기업들은 합리적 에너지 공급과 탈탄소 비용 사이에서 최적의 전략 수립을 위해 심사숙고 중이다.
이런 상황은 대부분 단기적으로 화석 연료에 유리한 경우가 많다. 하지만 장기적인 국가 에너지 로드맵 수립을 위해서는 초기 비용을 어느 정도 감수하더라도 각국의 탄소 감축 서약에 맞춰 탈탄소 대책의 강도를 어느 정도 상향 조정할 필요가 있다. 잘 정착된 탈탄소 정책과 규제, 그리고 이를 준수하는 업계 분위기는 장기적으로 국내 사업체의 해외 진출에 간접적 인센티브가 될 것이다. 다만, 탈탄소 대책 역시 에너지 안보가 확보된 상황을 전제로 추진돼야 하는 것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산업이 성장하면 더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거나 요구하기 마련인데, 환경문제로 에너지 공급을 줄일 수는 없지 않은가.

장기적인 국가 에너지 로드맵 수립을 위해서는
초기 비용을 어느 정도 감수하더라도 각국의 탄소 감축 서약에 맞춰
탈탄소 대책의 강도를 어느 정도 상향 조정할 필요가 있다

2020년 초에도 코로나19로 팬데믹 상황이 발생하면서 에너지 가격의 변동성이 몇 년간 증가했었다. 각국이 하늘 문을 닫으면서 화석 에너지의 가장 큰 수요 기관인 항공사들이 원유를 구매하지 않았고, 이에 따라 유류저장소와 비축기지가 가득 차면서 국제 유가가 마이너스까지 치닫기도 했다. 팬데믹 상황이 누그러질 때쯤 앞서 언급한 러-우 전쟁이 발발하면서 다시 원유의 수요가 급증함에 따라 국제 유가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러시아에서 유럽으로 가는 가스관을 차단함에 따라 추가적인 변동성이 생겼다. 이러한 가격의 심각한 변동성은 에너지 안보에 부정적인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 실제 코로나19와 러-우 전쟁이 겹치면서 국제 유가의 변동성은 그 이전 대비 거의 두 배가량 증가했으며, 이러한 변동성은 탄소 시장으로도 확산했다.

이러한 수요 및 공급의 불확실성과 에너지 가격의 변동성으로 인해 석유 기업들은 충분한 투자를 받지 못하고 있다. 안정적 공급망의 확보와 가격 변동성을 줄이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기존 시설의 지속적 유지·보수와 증산에 대비한 설비 보강, 그리고 추가 투자이다. 2010년 이후, 화석 연료의 생산 증대를 위한 투자 요청은 많았으나 과거에 비해 투자 자체는 미미한 수준이었다. 특히 기존 시설의 유지 보수를 위한 기초적인 투자뿐만 아니라 신기술 개발에도 충분한 자금 투입이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탄소 지중저장 관련 기술에는 상당히 공격적인 투자들이 이뤄져 왔다.

탄소 지중저장 부지 탐사와 유가스전 탐사를 비롯한 주입 및 생산 기술 개발은 그 차이가 크다. 특히 지구 물리 및 지질과 관련된 부지 탐사 기술은 핵심 기술이 거의 같다고 볼 수 있는데 단지 명분만 달리해 연구 개발에 대한 투자가 이뤄진다는 것은 투자자들이 기술의 핵심을 간과하고 지나치게 세계적 흐름에 의지해 판단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들게 한다. 이런 기조로는 급변하는 국제 정세와 에너지 공급 변동성에 탄력적으로 대응해 견고한 에너지 안보 시스템을 구축하기 쉽지 않아 보인다.

합리적인 에너지 전환이 필요한 때

현재 각국의 정부와 기업은 에너지 전환이라는 시대적 사명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에너지 전환이라는 난제를 해결하기 위한 초기 단계에서는 솔루션의 다양화가 먼저 수반돼야 한다. 그 후 각 에너지 솔루션이 성숙해 가는 과정에 따라 에너지 안보, 가격 적정성, 친환경성 등을 따져 경제적·정책적으로 가장 수용성이 높은 솔루션을 선택하는 것이 현명하다. 반면, 에너지 전환을 시도하는 초기 단계에서 실질적으로 에너지 안보에 가장 크게 기여할 수 있는 화석 에너지에 대한 무리한 감축과 투자 위축, 청정에너지로의 급진적 변환은 합리적인 전략이 아니다. 특히 해외 에너지 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의 경우, 에너지 안보의 중요성이 증가하고 안정적인 공급망 확보가 국가 발전의 필수 요소로 대두되고 있으므로 화석 에너지를 비롯한 전통적 에너지원의 유지를 위한 투자가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

에너지 전환이라는 난제를 해결하기 위한 초기 단계에서는
솔루션의 다양화가 먼저 수반돼야 한다

에너지 트릴레마 다이어그램의 각 끝단에 있는 가치들은 모두 중요하다. 아울러, 에너저 위기와 기후 변화 문제는 개인이나 단일 국가가 해결할 수 없는 범지구적인 문제다. 우리나라 역시 이 난제를 위해 크게 기여할 것이 자명하다. 다만, 문제 해결 방법을 찾는 데 있어 국제 정세와 트렌드를 따르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나라 내부적으로도 안정적이고 장기적인 에너지 안보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도록 정부와 민간의 투자 공조가 필요한 시점임을 기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