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리스트
여행은 풍경이 아니라, 시선을 바꾸는 여정
90여 개국을 누빈 박성호 여행작가
에너지X문명 비쥬얼 이미지
EBS '세계테마기행' 등에 출연하며 세계 곳곳을 여행해 온 박성호 여행작가.
그는 낯선 장소에서 만난 사람과 자연을 통해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다고 말한다.
여행과 일상, 그리고 거대한 자연이 주는 힘에 대한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재생버튼
마우스커서
정답을 찾기보다, 나에게 맞는 방향으로
Q. 요즘 많은 사람이 '내가 걷고 있는 길이 정말 나의 길일까'를 고민합니다.
작가님은 어떻게 지금의 삶에 도착하게 되었나요?
여행가라는 직업을 이야기할 때 가장 많이 받는 질문입니다. 대부분 제가 치밀한 인생 계획을 세워 지금의 일을 하게 됐다고 생각하시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카이스트에 진학하기 전까지 학창 시절 대부분을 대치동에서 보냈습니다. 학교와 학원을 반복했고,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는 기숙사 생활을 했습니다. 정해진 공간과 일정 안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다 보니 오히려 바깥세상에 대한 궁금증이 점점 커졌던 것 같습니다.
가장 큰 전환점은 대학 시절 1년간 휴학하고 호주의 바나나 농장에서 일했던 경험입니다. 이전까지는 주로 책이나 수업을 통해 세상을 배웠다면, 그곳에서는 직접 몸으로 부딪치며 살았죠. 그 경험을 계기로 더 다양한 세상을 직접 만나고 싶어졌습니다.
호주의 바나나 농장
처음부터 ’나는 여행을 정말 좋아하니 반드시 여행가가 되어야겠다’는 확신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때그때 마음이 끌리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내가 원하지 않는 것과 맞지 않는 것을 하나씩 피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가장 좋아하는 여행을 일로 삼고 있었습니다.
반드시 좋아하는 일을 단번에 발견해야만 자기 길을 찾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모르겠다면, 적어도 무엇을 원하지 않는지는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싫은 것을 하나씩 덜어내는 것도 자신의 방향을 찾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Q. 낯선 세계를 향한 호기심은 어디에서 시작됐나요?
어린 시절, 아버지께서 중동에서 건설일을 하며 직접 쓰셨던 글과 시, 사진들을 보며 낯선 공간에서 생활하고 기록하는 삶을 자연스럽게 상상했던 것 같습니다. 저 역시 언젠가는 익숙한 곳을 벗어나 새로운 공간에서 글을 쓰며 살아 보고 싶다는 막연한 꿈을 품었습니다. 한 사람의 선택은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어린 시절부터 접한 장면과 기억이 오랜 시간 안에 축적된 결과일 수도 있습니다. 저에게는 아버지가 사막에서 남긴 글과 사진이 그런 씨앗이었던 것 같습니다.
장소를 넘어, 그곳에 사는 사람을 만나다
Q. 여행을 깊이 있게 경험하려면 무엇을 보아야 할까요?
지난 5년간 매년 EBS 촬영에 참여해 탄자니아, 노르웨이, 스리랑카, 인도네시아 등을 다녀왔습니다. 여행을 직업으로 삼은 사람에게는 정말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 같은 기회입니다.
혼자 여행할 때는 주로 장소 자체에 집중합니다. 어디가 아름다운지, 어떤 풍경이 특별한지를 먼저 보게 됩니다. 하지만 다큐멘터리는 풍경만으로는 긴 이야기를 채울 수 없습니다. 결국 현지 사람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들의 집을 방문하고 함께 식사하며, 그 지역에서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는지를 가까이 들여다봅니다. 혼자 떠난 여행에서는 장소를 중심으로 보았다면, 다큐멘터리를 촬영하면서부터는 사람을 중심으로 여행하게 됐습니다.
여행지를 기억하게 하는 것은 눈에 띄는 풍경이지만, 그곳의 의미를 오래 남게 하는 것은 결국 사람의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세계테마기행> 탄자니아 편 (출처: EBS 다큐)
Q. 수많은 사람을 만나며 삶을 바라보는 태도에도 변화가 있었을 것 같습니다. 특히 기억에 오래 남은 만남이 있나요?
어떤 단 한 번의 경험 때문에 삶 전체가 바뀌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수많은 경험이 조금씩 쌓여 지금의 태도를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그중에서도 스리랑카 산골 마을에서 만난 꽃 파는 청년이 기억에 남죠.
그곳에는 자동차가 산길을 따라 이동할 때마다 꽃을 팔기 위해 산을 가로질러 달리는 청년들이 있었습니다. 한 지점에서 꽃을 팔고 나면 다시 산을 뛰어넘어 자동차보다 먼저 다음 지점에 도착해 기다리는 방식이었습니다. 온종일 맨발로 산을 달려도 하루에 버는 돈은 1만~2만 원 남짓이었습니다.
<세계테마기행> 스리랑카 편 (출처: EBS 다큐)
하루 동안 함께 촬영한 뒤 그 청년의 집에도 방문했습니다. 꽃을 파는 일은 단순히 개인의 생업이 아니라 마을 전체의 생계를 지탱하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스물여섯 살이던 그는 어머니와 같은 침대를 사용하고 있었고, 돈을 벌 때마다 벽돌을 조금씩 사서 집 뒤편에 새로운 집을 짓고 있었습니다.
촬영을 마친 뒤 출연료 명목으로 300달러를 건넸습니다. 적지 않은 돈이었는데, 그는 돈을 받자마자 우리를 안내해 준 현지 운전기사들에게 100달러씩 나누어 주었습니다. 자신에게 꼭 필요한 돈이었을 텐데도 전혀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사람은 어느 정도의 마음에 이르러야 물질에 대한 집착에서 저렇게 자유로울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엇을 얼마나 많이 가졌는가 보다 자신이 가진 것을 어떻게 바라보고 나누는지가 삶의 풍요를 결정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자연 앞에서 인간의 자리를 다시 생각하다
Q. 작가님의 여행 사진 중에 야생동물이 유독 많은데요, 세 번이나 찾은 세렝게티! 거대한 자연에서 무엇을 보셨나요?
동아프리카의 스와힐리어로 ’사파리(Safari)’는 본래 ’여행’을 뜻합니다. 저는 말 그대로 여행을 하기 위해 세렝게티를 찾았습니다. 세렝게티는 동물원이 아닙니다. 지프를 타고 야생을 이동하며 동물이 나타나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사람의 계획이나 편의에 맞춰 움직이는 존재가 거의 없습니다. 그곳에 있으면 사람이 등장하기 이전 지구의 모습을 엿보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자연 속에 드러난 죽음이었습니다. 사방에 버팔로의 뼈와 내장이 놓여 있고, 구더기가 들끓기도 합니다. 나무 위에는 표범이 먹다 남긴 얼룩말의 머리가 걸려 있기도 합니다. 처음에는 잔인하고 충격적으로 느껴집니다.
세렝게티
하지만 그런 모습을 며칠 동안 반복해 보다 보면 생각이 달라집니다. 그것은 잔인함이라기보다 하나의 생명이 다른 생명으로 이어지는 자연의 거대한 순환이었습니다. 인간의 눈에는 죽음과 소멸로 보이는 장면이 자연 전체에서는 생태계를 유지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도시에서만 생활하면 자신도 모르게 인간을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됩니다. 눈앞의 문제와 감정이 세상의 전부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거대한 자연 속에서는 인간 역시 수많은 생명 중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가끔은 자연 속에서 개인의 시선보다 훨씬 큰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시간이 필요합니다.
Q. 오지와 자연을 오랫동안 여행하며 환경의 변화도 직접 체감하셨을 것 같습니다.
가장 크게 느끼는 변화는 야생동물을 만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아프리카 역시 빠르게 도시화되고 현대화되고 있습니다. 과거에 오지라고 불렸던 지역에도 도로와 건물이 들어서고 사람의 생활 반경이 넓어지고 있습니다. 그만큼 동물들은 인간을 피해 더 깊은 숲속으로 이동합니다.
예를 들어 8년 전 처음 방문했을 때는 길거리에서 동네 개를 보듯 흔하게 만날 수 있었던 품바, 즉 혹멧돼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다시 찾아갔을 때는 흔적조차 보기 어려웠습니다. 현지인들에게 물어보니 모두 사람을 피해 숲속 깊이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갈라파고스의 바다사자
마다가스카르에서 만난 리머
여행자로서 새로운 동물을 만나기 어려워진다는 아쉬움도 있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생태계의 다양성이 빠른 속도로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앞으로 야생동물을 보려면 대체 어디까지 들어가야 할까’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인간의 영역이 지나치게 넓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고민하게 됩니다.
자연은 어느 순간 갑자기 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 동물 한 종이 눈앞에서 사라지고, 익숙했던 풍경이 조금씩 바뀝니다. 여행자는 아름다운 자연을 소비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곳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지 살펴볼 책임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행은 반드시 멀리 이동하는 일이 아니라 익숙한 것을 새롭게 바라보는 태도일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를 하나의 새로운 여행이라 생각하며 활기차고 긍정적으로 보내셨으면 좋겠습니다.
멀리 떠날 수 없는 날에도 우리는 매일 새로운 하루에 도착합니다.
하루를 여행하듯 살아간다면 익숙한 일상도 조금은 다른 풍경으로 보일 것입니다.
박성호 여행작가의 올 여름 추천 여행지!
마음을 돌볼 수 있는 ‘몽골’
회사와 집을 반복하며 생활하는 직장인이라면 몽골의 거대한 자연을 한 번쯤 직접 경험해 보셨으면 합니다. 몽골의 게르에서 머물며 밤하늘의 별을 보는 것만으로도 일상과는 전혀 다른 감각을 느낄 수 있습니다. 주변을 가로막는 높은 건물도 없고, 끊임없이 울리는 알림도 없습니다. 시야를 가득 채우는 초원과 하늘만 남습니다.
압도적으로 넓은 자연 앞에 서면 내가 붙잡고 있던 고민의 크기가 달라 보일 거예요.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시야가 넓어집니다. 내 삶의 골칫거리를 조금 더 작고 사소하게 바라보기 위해서라도 가끔은 거대한 자연 속으로 떠날 필요가 있습니다.
여행은 현실을 피하기 위한 도피라기보다, 현실을 다른 크기로 다시 바라보기 위한 거리 두기일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연으로 떠나는 여행은 정신 건강을 돌보는 하나의 방법이기도 합니다.
구독하기 이전 호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