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루덴스의 기후위기
주방 커튼 뒤는 전쟁!
기후위기 속 지역미식의 생존법

저자  한빛나라 기후사회연구소 소장

호모 루덴스의 기후 위기 비쥬얼 이미지
기후변화는 세계 곳곳에서 지역의 미식문화를 위협하고 있다.
지역미식의 근간을 이루는 주요 식재료의 수확량이 줄고,
환경 변화로 전통적인 제조 방식을 고수하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이런 도전적 상황에서 지역미식의 내일을 위한 생존 전략은 무엇일까?
해외의 대표적인 지역미식 사례를 통해 지역미식의 오늘과 내일을 살펴보자.
지난 6월 9일, 강원도 강릉에서 100㎏이 넘는 참다랑어가 백여 마리나 잡혔다는 소식에 업계가 들썩였다. 특히 울진과 영덕에서는 하루 만에 각각 190t, 43t이 잡히며 작년 한 해 수확량을 가볍게 넘어섰다. 2018년 2톤에 불과하던 참다랑어 어획량은 불과 몇 년 사이 80배가량 늘었다. 지난 60년간 동해 수온이 2℃ 이상 오른 탓이다. 이제 우리도 한 번도 얼리지 않은 국내산 생 참치를 맛볼 수 있게 되었다고 항간이 떠들썩했다. 동해산 생 참치회라니, 분명히 식탁 위 풍경을 바꿀 만한 사건이다!
자료: 강원도 제2청사 해양수산국
난대성 어종인 참치, 정어리, 고등어가 북상하는 동안, 원래 우리 식탁 위 안방주인 노릇을 해오던 명태, 오징어, 꽁치는 자취를 감췄다. 명태가 사라지자, 강원도의 명태 미식 문화도 덩달아 위기다. 가공 방식, 잡힌 시기, 보관 상태 등에 따라 황태, 북어, 코다리, 노가리 등 다채로운 이름을 자랑했건만 이제는 그 많던 이름이 머쓱해졌다. 이제 고성의 황태국은 러시아산 명태로 만들고, 포항 과메기는 대만산 꽁치로 만든다.
러시아산 명태와 대만산 꽁치를 활용해, 강원도 황태와 포항 과메기의 전통 제조 방식을 이어가는 모습 (AI로 제작한 이미지)
그러면 고성과 포항의 전통 미식 문화는 이제 사라질 일만 남은 것일까? 꼭 그렇지는 않다. 지역의 식재료는 사라졌어도 그것을 말리고, 보관하고, 가공하고, 요리하고, 함께 나누는 미식 문화는 여전히 생생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강원도 황태는 러시아산 명태를 고성 거진항이나 진부령, 인제 용대리 덕장으로 가져와 강원도 산골의 칼바람을 맞히며 3~4개월 동안 얼리고 녹이며 만든다. 포항 과메기는 대만산 꽁치를 구룡포 특유의 밤바람과 해풍으로 건조해 만든다. 모두 ‘Made Green in Korea’다.

거꾸로 동해에 새롭게 출현한 정어리, 고등어, 멸치에 지역 전통 미식 문화를 새롭게 입혀볼 수도 있다.
지역 전통 식재료가 위기라고 미식 문화마저도 위기인 것은 아니다.
식재료는 미식 문화의 일부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미식이 아니라 그를 둘러싼 ‘문화’에 집중하며 고고한 전통을 성공적으로 이어 나가고 있는 세계의 미식 고수들을 만나러 가보자.
미식을 기후대응 수단으로, ‘알바 화이트 트러플’
서양 미식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 트러플(서양송로버섯)이다. 트러플은 그 자체로 세계 3대 진미 중 하나로 꼽힐 만큼 귀하고 비싼데, 하물며 화이트 트러플은 그 희소성 때문에 ‘땅 속의 다이아몬드’라고 불릴 만큼 가치가 높다. 가격으로 따지면 1kg이 수백만 원에서 수천만 원을 호가한다. 이 희소성의 근거는 화이트 트러플이 주로 이탈리아 피에몬테주 알바(Alba) 지역에서 자란다는 사실에 있다. 그래서 알바시는 10월부터 12월 초순까지 이어지는 트러플 채취 기간에 “알바 국제 화이트 트러플 박람회”를 연다. 무려 1929년에 시작된 전통 깊은 지역 미식축제다.
화이트 트러플을 활용해 만든 음식(출처: ‘알바 국제 화이트 트러플 박람회’ 공식 홈페이지)
화이트 트러플 박람회 기간에는 트러플 마켓과 함께 다양한 민속 행사가 진행된다 (출처: ‘알바 국제 화이트 트러플 박람회’ 공식 홈페이지)
화이트 트러플은 채취하는 방법이 아주 재밌다. 화이트 트러플은 송이버섯처럼 인공재배가 불가능해 반드시 자연에서 채취해야 하는데, 보통 땅속 약 10~40cm 깊이에서 자라서 제 아무리 경험 많은 트리폴라우(트러플 채취꾼)라도 혼자 힘으로 찾아낼 방법은 없다. 이때 등장하는 것이 바로 잘 훈련된 ‘개’다. 탐지견이 트러플 냄새를 맡고 앞발로 땅을 긁으면 트리폴라우가 재빨리 ‘바네토’라 불리는 전통 삽으로 트러플을 조심스럽게 파낸다. 트러플을 파낸 뒤에는 흙과 나뭇잎을 덮어 감쪽같이 흔적을 없애는데, 땅속에 남아 있는 균사를 보호해서 내년에도 트러플이 자라나도록 하기 위한 약속이다. 이런 자연친화적이고 생태중심적인 채취 방식은 전통적 가치와 지속가능성을 인정받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알바 지역의 대표적인 유산이다.
트리폴라우(Trifolau)와 트러플 사냥개(Tabui)가 트러플을 찾아내는
모습 (출처: ‘알바 국제 화이트 트러플 박람회’ 공식 홈페이지)
‘2026년 알바 국제 화이트 트러플 박람회’의 메인 이미지. 인간과 자연의 상호성과 생물의 다양성, 생태계의 섬세함 등을 암시한다 (출처: ‘알바 국제 화이트 트러플 박람회’ 공식 홈페이지)
기후변화는 알바 지역의 트러플 생산에도 위기를 가져왔다. 고온 건조한 여름이 길어지면서 트러플이 땅속에서 말라 죽거나 풍미가 줄면서 수확량이 감소한 것이다. 최근 30년간 이탈리아 내 화이트 트러플 자생지는 30% 가까이 감소했다. 이에 알바시는 트러플 수확량을 조절하기 위해 연간 채취 제한 기간을 엄격하게 시행하고, 채취 허가제를 도입해 자격증이 있는 사람만 트러플을 채취할 수 있도록 했다. 자격증이 있는 트리폴라우가 하루에 채취할 수 있는 법적 제한량은 2kg이다. 시는 또한 트러플이 잘 자랄 수 있도록 토종 활엽수를 심고, 토양을 보호하고 생태 복원을 추진하는 등의 노력도 기울이고 있다.
알바시는 화이트 트러플을 둘러싼 친환경적이고 생태적인 지역 미식문화 그 자체를
지속가능한 미식의 전략이자 실천방안으로 내세운다.
즉, 알바 화이트 트러플은 그 자체로 지속가능한 미식이며,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훌륭한 수단이라는 것이다.
‘국제 화이트 트러플 박람회’는 알바 지역의 지속가능한 미식문화의 꽃이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미식문화, ‘프로슈토 디 파르마 햄’
이번에도 이탈리아다. 앞의 화이트 트러플 사례가 자연친화성에서 지속가능한 지역미식의 미래를 모색했다면, 이번에는 원산지 보호 지정(Protected Designation of Origin)과 이탈리아 친환경 인증 등을 통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최고급 미식 브랜딩으로 지역미식의 비전을 수립했다는 점이 다르다.

프로슈토 디 파르마(Prosciutto di Parma). 돼지 뒷다리를 파르마 구릉지대에서 불어오는 건조한 바람으로 일 년 이상 장기 숙성해 만든 파르마 지역의 전통 생 햄이다. 이탈리아 중북부 11개 지정 지역에서 자란 특정 혈통의 돼지만 사용하며, 파르마 지역의 또 다른 명물인 파르미지아노 레지아노(파마산 치즈)를 만들고 남은 치즈 유청을 먹여 키워서 특히 지방층이 고소하고 부드러운 것이 특징이다. 파르마 햄은 오로지 소금과 파르마 지역의 바람으로만 만들어낸 세계적인 명품 햄이다. 이러한 독특한 지역색을 입은 덕분에 파르마 햄은 이미 1970년에 원산지 명칭 보호 제품으로 국가 인증을 받았고, 1996년에 유럽연합으로부터 원산지 보호 지정 인증을 받았다. 파르마 햄은 파르마 지역의 정체성이고 브랜드다.
품질 검사를 통과한 햄에 새기는 ‘PARMA 왕관’ 불도장
(출처: 유럽 연합 공식 홈페이지)
원산지 보호 지정 인증 마크 (출처: 유럽 연합 공식 홈페이지)
원산지가 중요한 원산지 보호 지정 식품인데 원산지의 생산 여건이 좋지 않다면 어떻게 될까? 그것은 지역미식에 큰 위기를 가져올 수 있다. 파르마 햄의 사정이 지금 그렇다. 기후변화는 파르마 지역도 예외로 두지 않았는데, 파르마 햄 생산에 필수적인 바람의 온도가 상승하고, 가뭄으로 초지가 줄어 우유 생산량과 함께 돼지를 먹일 유청 공급이 줄어들고, 기온상승에 따른 아프리카돼지열병의 확산으로 돼지 공급량이 줄어드는 등 기후변화가 파르마 햄의 생산 환경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

이에 파르마 햄 업계는 우선 파르마 햄의 탄소발자국부터 줄여서 기후위기 대응에 동참하기로 했다. 백여 개의 파르마 햄 제조업체들로 구성된 ‘파르마 햄 컨소시엄’은 2022년에 밀라노공대, 소프트웨어 업체 등과 파트너십을 맺고 파르마 햄의 환경발자국을 계산하고 줄이도록 돕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했다. 이는 돼지 사육부터 도축, 소금 절임, 숙성 창고 운영, 슬라이스 팩 포장에 이르기까지 햄 생산 전주기의 탄소 배출량과 에너지 소비량을 정밀하게 추적하고, 어디서 탄소와 에너지를 줄일 수 있는지 알려주는 일종의 환경 관리 도구다. 지역 햄 업체들의 자구적인 노력은 이내 국가 인증인 '이탈리아산 친환경 인증(Made Green in Italy)' 획득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국가 공인 친환경 인증을 통해서 파르마 햄의 명품 이미지는 햄의 짙은 풍미만큼이나 더 강화되는 효과를 얻었다.
파르마 햄을 활용한 레시피 (출처: 파르마 프로슈토 협회 @prosciuttodiparma_it)
파르마 햄 업계는 기후변화만 탓하며 손 놓고 있기보다는
지역이 실현할 수 있는 지속가능성에 집중했다.
업계는 지역미식 공급망의 탄소 관리에 적극적으로 나서서
파르마 햄을 친환경적이고 지속가능한 미식으로 한 단계 격상시켰다.
이로써 오직 파르마 지역에서만 생산되는 명품 햄은
대체불가한 지속가능한 미식으로 입지를 다지며
로마 시대부터 2천 년을 이어온 전통을 오늘에 되살리고 있다.
전통과 변화의 절묘한 균형
파르마 햄 업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기후변화는 계속 진행 중이라서, 전통 숙성창고들은 자연 바람 대신 인공 에어컨과 공조 시스템을 가동해야 하는 처지다. 전통 제조 방식을 고수하면서 동시에 변화한 환경에도 적응해야 하는 딜레마가 여기 있다. 전통을 지키기 어려운 환경이라면 기술의 혜택은 어디까지 허용할 수 있을까? 전통도 중요하지만 환경과 호흡하지 못하면 사라지는 건 시간 문제다. 참고로 파르마 햄은 공조 시스템을 보완적으로 사용하더라도 원산지 혈통과 자연 재료 사용의 원칙을 엄격히 준수한 경우 정품으로 인정한다.
전통만을 강조하면서 전통의 소멸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기보다는
전통을 적극적으로 재해석해서 전통에 질긴 생명력을 부여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미식문화는 원래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그것이 미식의 본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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