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On

멈춰 있는 것 같은 이 순간에도
우리는 각자의 속도로
‘성장’하고 있어요

하이킹 아티스트 김강은

“이 그림, 여기서 지금 그리신 거예요?”, “어머, 너무 예뻐요. 나도 이렇게 한 번 그려보고 싶네.”
산에 올라 눈앞에 보이는 풍경과 순간의 감정을 작은 도화지에 그리고 있노라면, 지나가던 이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곤 한다.
몇 년간 이어온 일인데도 쏟아지는 질문과 눈길은 여전히 쑥스럽지만, “나중에 전시하면 꼭 보러 오세요”라고 능숙하게 받아치는 여유가 생겼다.
산과 함께 희로애락을 함께하는 하이킹 아티스트이자 녹색활동가 김강은 씨는 오늘도 산을 오르며 삶의 의미와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찾는다.

Q

산의 매력에 빠지게 된 계기가 궁금해요.

졸업을 앞두고 있을 때쯤 개인적으로 굉장히 힘든 시기를 보낸 것 같아요. 좋은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고, 대학에서는 좋아하는 그림을 열심히 그렸기에 졸업하면 앞날이 창창하진 않더라도 적어도 걱정은 없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다시 취업을 위해 그간 해왔던 것들을 반복해야 하더라고요. 그때 삶에 배신감을 느꼈던 것 같아요. 책상 앞에 억지로 앉아 하기 싫은 일을 반복하던 어느 날 답답하고 막막한 감정이 최고조로 달해 방문을 박차고 나왔어요. 새로운 곳이나 멀리 갈 용기는 없어 집 앞 산에 올랐어요. 우연히 산에 올랐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어렸을 때부터 아빠와 함께 수락산과 도봉산을 종종 올랐거든요. 그래서 산으로 향했던 것 같아요.
내내 집에서만 생활하다 보니 체력이 이미 바닥이었는데, 정말 모든 체력을 긁어모아 산 정상에 올랐어요. 정상에 오르고 나서야 고개를 들어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는데, 그동안 꽁꽁 쌓여 있던 답답한 마음이 ‘탁’ 터지는 것 같았어요.
우리가 일상 속에서 살다 보면 일상의 일부로 쳇바퀴처럼 굴러가기 바쁘잖아요. 그런데 산에 오르면 우리가 사는 곳이 발아래 저만치에 보이거든요. 일상에서 한 발자국 떨어져 바라보니 당장 죽을 것 같던 고민들이 먼지처럼 작게 느껴지더라고요. 바람이 불어와 흐르는 땀을 식혀주고, 물 한 모금이 이렇게 맛있었나 싶고, 쿵쿵 뛰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내가 살아있음을 느꼈어요.
그때의 느낌이 너무 좋아 ‘산을 오르자’라고 생각했던 것이 점점 확장되어 지금까지 이어졌어요.

Q

최근 재충전의 시간을 가졌다고요. 그 시간을 통해 얻은 것이 있었나요?

이전처럼 벽화 작업도 하고 방송이나 글도 쓰고 여러 가지 콘텐츠 작업을 하다 보니 늘 정신없이 살았던 것 같아요. 그러다 문득 여기서 더 발전하려면, 지금과는 다른 변화가 필요하겠구나 싶었어요. 어느 날 오른 산이 직업이 되고 나름의 재능을 사람들과 나눠왔는데, 제 스스로 더 채워져야 사람들에게 더 나눌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제가 하이킹이나 트레킹 위주로 산을 올랐거든요. 산을 오르되 지금보다 더 성장할 수 있을 게 뭐가 있을까 생각하다 지난 4월에 등산학교에 입학했어요. 산악인을 양성하는 곳으로, 하이킹이나 트레킹이 아닌 등반을 하는 거죠. 기초적인 이론부터 안전 대비나 긴급 상황이 발생했을 때 할 수 있는 조치들, 산을 대하는 태도나 장비 등 하나부터 열까지의 이론을 배우고 또 실습을 병행했어요.
제가 그동안 산에 오른 이유는 오르는 행위를 통해 몸을 움직여 마음을 정화하고 자연에게 위안 받는 것이 컸거든요. 그런데 산악인들은 ‘산이 위험하니까 가는 것’이라고 하더라고요. 처음엔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가 어려웠는데, 졸업할 때쯤 알겠더라고요. 내 앞을 가로막은 문제나 위험을 마주했을 때 그것을 해결하고 극복하는 과정에서 성취감을 느끼고 성장하고 있음을 몸소 느끼게 되더라고요. 저도 지난 6주간 잘 꾸며진 길이 아닌 새로운 길로 산을 오르며 살아있음을 느끼고, 바위에 매달려있을 땐 이렇게 삶이 간절했던 적이 있던가를 깨닫는 시간이었어요.(웃음)

Q

등산계에서는 알아봐 주시는 분들이 많을 것 같아요. 실감하시나요?

요즘은 MZ 세대들 사이에서도 하이킹이나 등산이 붐인 것 같아요. 산을 정말 좋아하거나 SNS를 하시는 분들이 종종 오며 가며 알아봐 주시더라고요. 그리고 제가 KBS 2 <영상앨범 산>이라는 프로그램에 몇 번 출연하다 보니 국민 산꾼(?) 분들께서도 인사해 주시고요. 그 프로그램이 정말 마니아층이 두껍거든요. 처음엔 저를 알아봐 주신다는 게 신기했어요. 여전히 부끄럽긴 하지만 감사한 마음도 커지고 그만큼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Q

작가님의 시그너처인 산에서의 그림을 시작한 계기가 있었을까요?

답답한 마음에 산에 오른 이후로는 그림이 아닌 등산이 전공인가 싶을 정도로 산에 집중했어요. 그림을 처음 시작했을 때는 순수하게 그림 그리는 것이 좋고 재미있었는데, 이걸 내 꿈이나 전공, 직업으로 생각하면서부터는 누군가에게 평가받아야 하고 과제에 쫓기고…. 그러면서부터 재미보다는 잘 해야 한다는 강박이 생겼어요. 나만의 작업 스타일도 찾아야 하는데 그 답을 찾지도 못했고요.
그런데 산은 일단 정상에 올랐으면 그 자체로 성공이고 잘한 거잖아요. 그래서 본업인 그림 그리는 것을 까맣게 잊고 지내던 어느 날, 그날따라 산이 너무 예쁜 거죠. 빛이 내리쬐는 풍경, 계절이 바뀔 때 나오는 자연의 다채로운 색감, 이런 자연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 풍경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진짜 좋아 하는 공간에서 내가 좋아했던 그림을 그리면 참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기까지 3년이나 걸렸어요. 그리고 실행에 옮기기까지 1년이 더 걸렸어요. ‘과연 잘 그릴 수 있을까’, ‘번거롭진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들면서 망설여지더라고요.
그쯤 제 SNS 계정의 아이디로 ‘하이킹 아티스트’를 쓰고 있었는데, 누군가 메시지로 묻더라고요. “사진을 예술처럼 잘 찍어서 닉네임에 아티스트가 들어간 건가요?”라고요, 그때, ‘아 내가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란 건 나만 아는구나’ 싶어 더 미루면 안 되겠더라고요. 그때부터 그림을 완성하자는 생각보다는 산에서 만난 내가 만난 자연을 나만의 감정대로 나만의 방식으로 표현해 보자 했던 것이 지금의 저를 만든 것 같아요.

Q

산에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 쉽진 않을 텐데, 어떠세요?

처음엔 색연필이며 물감이며 이것저것 바리바리 챙겨갔었는데, 지금은 딱 필요한 물건들로만 세팅한 저만의 도구를 만들었어요. 작은 종이, 자연의 색을 닮은 물감을 넣은 보석함 같은 팔레트, 작은 물병이면 충분해요. 잘 그리지 않더라도 나만의 느낌과 감정을 도화지에 그려 넣는 것, 그 자체가 제게 치유의 시간이거든요.

Q

새로운 분야를 개척한 셈인데, 본인의 삶에 어떤 영향이 있었나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죠. 산을 통해 놓았던 붓을 다시 들었고, 그로 인해 자신감을 얻었고요. 조금 먼 길을 돌아오긴 했지만, 오래전 저만의 스타일을 찾지 못해 방황하던 길에 오른 산에서 저만의 스타일을 제대로 찾은 셈이죠. 그리고 잘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자꾸만 움츠렸던 제 스스로가 더 이상 남의 평가나 시선에 신경 쓰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하면서 스스로를 사랑할 줄 알게 된 것 같아요.
끊임없이 새로운 것에 도전하기도 하고요. 누가 알았겠어요. 산에서의 제 첫 그림이 도봉산 선인봉이었는데, 그 바위 위에 제가 맨몸으로 매달려있을 거라는걸요. 저 조차도 상상하지 못했던 삶을 살고 있는 요즘이에요.

Q

산에 오르는 것 말고도 클린하이커스와 같은 지구를 위한 활동도 하신다고요?

산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산에 오르며 버려진 쓰레기를 줍는 클린하이커스(@clean_hikers)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어요. 산을 오르다 보면 쓰레기의 양은 물론이고 상상할 수도 없는 기상천외한 폐기물들이 넘쳐나요. 저희의 활동이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력을 미치길 바라며 꾸준하게 이어오고 있어요.
이 외에도 최근 1~2년간 코로나19로 제약이 따르면서 모이지 않더라도 각자 할 수 있는 활동이 없을까 고민하다 ‘채식하루(@vegeharu_official)’라는 프로젝트를 기획했어요. 매일은 아니더라도 일주일에 하루 정도 꾸준히 채식을 실천하면 물을 절약할 수도 있고 온실가스 감축은 물론, 탄소배출에도 도움이 된다고 하더라고요. 일주일에 하루 정도는 지구를 위해 기꺼이 채식을 실천할 수 있지 않을까요?

Q

산을 오르는 이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에티켓이나 안전지침이 있다면요?

산은 오르는 방법을 배운 사람들만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공간이잖아요? 그래서 기본적인 것들을 꼭 지키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우리나라 산은 생각보다 돌로 된 산이 많고 낮긴 해도 생각보다 험한 산들도 많거든요. 그래서 등산화까진 아니더라도 트래킹화 정도는 챙겨 신는 것이 안전해요. 그리고 산에서는 갑자기 온도가 떨어지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가벼운 방풍 재킷과 간단하게 요기할 수 있는 간식이나 만약의 상황을 대비한 비상약도 챙기면 좋아요.
그리고 음악을 크게 듣는 행위나 야생 동물에게 먹이를 주는 행위, 그리고 나물이나 도토리 같은 열매를 채집하는 행위는 당연히 삼가야 하고요. 여기에 가져온 쓰레기는 당연히 가져가고, 조금 더 욕심내면 함께 쓰레기를 줍는다면 더 좋겠죠?

Q

작가님에게 산은 어떤 존재인지 궁금해요.

순간순간 다를 것 같지만, 요즘 제게 산은 지켜주고 싶은 존재예요. 산을 통해 너무 많은 것을 얻었고 제 인생에 아주 큰 변화를 준 존재거든요. 그래서 받은 만큼 지켜주고 싶어요. 환경적인 문제가 심각한 요즘, 우리가 산을 지켜야 산도 우리에게 줄 것이 생기지 않겠어요? 저 뿐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산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으로 지금처럼 더 많은 활동들을 이어나갈 것 같아요.

Q

석유공사 직원들처럼 예민함과 긴장감을 갖고
일할 수밖에 없는 이들에게 하이킹이나 등산의 매력을 어필한다면요?

사람들이 힘들 때 ‘정신력으로 버텨라’ 이런 말들을 하잖아요. 그런데 저는 그럴 때일수록 정신력이 아닌 몸을 움직이고 땀을 흘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몸에 윤활유가 흘러야 정신도 정체되어 있지 않고 건강하게 흐른다고 믿거든요.
일단 산은 평지가 아니고 오르막길이기 때문에 몸이 격동적이게 돼요. 평소 움직이지 않던 근육의 움직임을 느끼기도 하고, 바람의 온도, 새들의 지저귐, 나뭇잎의 움직임 등 세상의 소음과는 다른 자연의 오감이 느껴져요. 그런 것들에 귀 기울이다 보면 멈춰 있던 톱니바퀴가 서서히 돌아가듯 몸에 활력이 생겨요. 생각이 많을 때는 생각을 비우게 되고, 삶의 지루함을 느낄 때는 오히려 생기를 채우게 되죠. 각자 필요에 따라 산이 맞춤으로 우리를 채워주는 것 같아요.
그리고 뭐든 첫 경험이 중요하잖아요! 너무 높은 산을 오르기보다는 자신의 체력을 체크한다는 생각으로 집 근처 산부터 올라보길 추천해요. 산을 오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우스갯소리로 대한민국 아니고 ‘대산민국’이라 할 정도로 지천에 산이 있거든요.

Q

‘도전’, ‘열정’, ‘성장’ 등 석유공사의 핵심 가치가 작가님의 모습과도
맞닿아 있는 것 같아요.
직원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나요?

꼭 눈에 보이는 성장만이 성장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요. 무언가에 끊임없이 도전하고 경험하는데도 별반 달라지는 게 없거나 멈춰있는 것 같을 때 우리는 좌절을 느끼게 되거든요. 그런데 분명한 건 우리는 그 순간에도 끊임없이 자라고 있어요. 힘들어도 이걸 꼭 해내야만 하는 시기가 있는가 하면 때론 쉼이 필요한 시기도 있거든요. 성장의 모습은 다양해요. 그러니 눈에 보이는 목표나 한계에 도달하는 것에만 목매지 말고 내가 어떤 상태인지, 내가 한 뼘 더 자리기 위해 지금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도 중요하다고 전하고 싶어요.

Q

앞으로의 계획을 이야기해주세요.

지금처럼 우리나라의 멋진 산들을 오르며 그림을 그리는 활동을 꾸준히 이어나갈 거고요. 사실 재작년부터 항상 말했지만 아직 이루지 못한 것 중 하나가 전시를 하는 거예요. 제가 그린 그림으로 백대 명산 전시도 좋고, 클린하이커스 활동과 연계해서 주워 온 쓰레기로 사람들과 함께 정크 아트를 완성하는 참여 형태의 전시도 좋을 것 같아요. 궁극적으로는 산과 환경에 관한 메시지를 던질 수 있는 그런 전시를 하고 싶어요.

왕보영      사진Studio Ke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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